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꾸르실료운동

주보성인 사도 성 바오로

바오로의 생애

사도 성 바오로

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(사도행전 22:3)
불행히도 바오로가 언제 탄생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전혀 없지만, 전승에 의하면 바오로가 예수보다 10여 년 늦게 출생했다고 한다.

바오로는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교육과 그리스문화의 교육을 받았으며,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다.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바리사이파였던 바오로는 안식일을 지켜야한다는 계명을 무시하는 등 율법에 도전하던 예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.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를 잡아 가두는 등 교회를 박해하는 데에 앞장섰다.

그리스도교 신자를 잡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바오로는 “왜 나를 박해하느냐?”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회심하여 (사도행전 22:5~11) 그때부터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다.

바오로의 회심

바오로의 회심

악인에서 선인으로 돌아서는 윤리적인 '회개'도 아니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의 '개종'도 아니었다. 바오로의 회심은 ‘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’, 곧 ‘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심’(로마 8, 9)으로써 그리스도께 소속되는 것을 말한다.

바오로는 3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초대교회를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.
바오로는 초대교회 안에서 사도로서의 권위에 의심과 도전을 받았으나
그 때마다 ‘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주님에게 직접 받았음’을 거듭 강조하며(갈라1,1~2, 15~16, 1코린 15,9)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에게 임명된 사도임을 주장했다.

바오로는 3차 전도 여행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구금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갔다. 로마시민권자였던 바오로는 가택연금상태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. 바오로가 어떻게 순교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, 전승에 의하면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.
(이미지 : 성바오로대성당 바오로상)

제2차 바티칸 공의희가 시작된 직후,

즉 1963년에 교황 성 바오로 6세께서는 복음선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바오로 성인을 꾸르실료의 주보성인으로
정해주시며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꾸르실료를 교회 내 신심단체로 인정해 주셨다.